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헤르만 괴링 (문단 편집) === 재판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museumofworldwarii.org/068-GoeringDetentionRepor.jpg|width=100%]]}}} || || {{{#ffffff 괴링의 관리 기록 카드와 [[머그샷]]}}}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Defendants_in_the_dock_at_the_Nuremberg_Trials.jpg|width=100%]]}}} || || {{{#ffffff 맨 앞 줄, 맨 왼쪽의 인물이 괴링이다}}} || 다른 나치 독일의 핵심 인사와는 달리 히틀러와 함께 자살하지 않고 스스로 전권대사로 대우받기를 원하고는 미군 장교에게 항복하였다. 이후 전쟁범죄자로 체포되어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의 피고 중에서는 가장 거물이 되었다. 이 때 군복의 부착물을 전부 소련의 요구로 강제 탈거했다. 이는 육군원수 [[빌헬름 카이텔]]과 육군 상급대장 [[알프레드 요들]]도 마찬가지로, 군인들은 전부 사복을 입든가, 서훈, 훈장, 계급장 등 부착물을 전부 다 제거한 군복을 입어야 했다. 가택 연금되었다가 교도소로 들어올 때 복용이 금지된 모르핀 대신 법에 허용되는 각성제를 '''2만여 정'''이나 가지고 들어왔고[* 그런데 이 각성제들, 정황상 '''[[필로폰]]'''일 확률이 매우 높다.] 아침 저녁으로 각각 20알씩 복용했다. 교도소장은 이것이 그의 정신상태를 해친다고 판단하여 미 육군 [[군의관]]들에게 이를 치료하도록 명령했고, 군의관들은 하루에 한 알씩 줄이게 했다. 괴링은 상당히 고통스럽게 생각했으나, 결국 각성제 복용을 끊을 수 있게 되었다. 거기다가 교도소에서 규칙적인 운동을 하고 식사도 조절되다 보니 몸무게도 감소하여 청년시절의 [[훈남]] 모습이 되돌아왔다. 마약을 끊으니 정신도 맑아졌다고 한다. 나치 정권 시절에는 그의 과시욕과 허영 때문에 나치 고관들조차 그를 피했으나, 뉘른베르크에서는 젊었을 시절의 친화력과 카리스마가 회복되어 나치 전범들의 우두머리 노릇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회복한 육체적-정신적 건강으로 사형을 면하기 위해 자신을 정력적으로 변호했다. 영어와 프랑스어 등 외국어 실력도 다른 전범 피고들 가운데 가장 유창했고 화술도 좋아[*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살아 있었다면 괴링보다도 더 뛰어났겠지만, 해당 시점의 괴벨스는 이미 자살로 생을 마감한 상태였다.] 가끔은 날카로운 논리를 구사하여 연합국 측 검사나 판사들의 말문을 막기도 했으나, 워낙 나치가 저지른 짓은 미증유의 것이라서 스스로도 사형을 면할 것이라고는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듯 하다.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ssyydfluq3421.jpg|width=100%]]}}} || 그는 재판 과정에서 힘러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하이드리히]] 같은 자들에게 전쟁범죄의 책임을 전가하기는 했지만, 히틀러에 대한 비난이나 책임 전가는 일체 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괴링과 힘러를 동급으로 취급해서 자살시에 모두 후계자에서 배제했지만, 자살을 결심한 히틀러에게 (예전에 히틀러가 한 명령에 따라) 후계자 자리를 요구한 괴링의 행동이 부당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히틀러에게 알리지도 않고 후계자 행세를 하고, 심지어 히틀러에게 알리지 않고 스웨덴을 중재로 연합국과 강화를 맺으려고 하다가 이것이 들통나서 히틀러가 자살하기 직전에 모든 지위에서 해임당하고 사형 선고를 받은 힘러보다야 훨씬 양호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괴링은 히틀러에게 끝까지 충성을 바친 것이다. 슈페어가 뉘른베르크에서 자신이 총통의 벙커에 독가스를 살포해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고 자백하자[* 명백히 슈페어의 헛소리다. 그의 회고록을 보면 이 시점은 1944년 7월 20일 이후로, 총통은 신변의 안전을 위해 굴뚝의 높이를 대거 높였다. 그런데 그 곳에 독가스를 넣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동참한 가담자들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도 없는데, 슈페어가 사형을 면하기 위해 꾸민 거짓말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누구보다 격노하여 고함을 질렀고 재판이 종료된 다음에 슈페어에게 ''여기서 나가거들랑 네놈부터 반역죄로 처형해주마!"라고 일갈했다는 얘기가 있다. 물론 누구보다 똑똑했던 괴링 본인이 살아서 나갈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닐 테고 아마 히틀러에게 총애를 받던 자가 배신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분개한 것으로 보인다. [[바르샤바 봉기]]에서 봉기군을 잔악하게 짓밟은 SS 대장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거짓말을 일삼고 동료들을 배신하는 추태를 보이자 재판 도중에 격노하여 동석해 있던 [[알프레트 요들]] 상급대장과 같이 "역겨운 돼지새끼"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이때 바흐-첼레프스키는 피고가 아니라 증인 자격으로 나와 있었는데 독소전쟁 중 파르티잔 학살에 도가 튼 그가 증인으로 나와 있었으니 괴링 입장에서는 울화통이 터질 판. [[https://books.google.co.kr/books?id=uQouAAAAQBAJ&pg=PA31&dq=erich+von+dem+bach+zelewski&hl=ko&sa=X&ved=0ahUKEwjXm_PbgI7OAhXBto8KHUvXAxQQ6AEIMDAD#v=onepage&q=erich%20von%20dem%20bach%20zelewski&f=false|출처]] 괴링이 그 난리를 쳤는데도 판검사 측은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본인들이 봐도 첼레프스키의 행태가 어지간히 짜증난 듯. 솔직히 피고였으면 확실하게 사형당했을 놈이 증언을 해주는 대가로 피고가 아니라 증인이 되었으니… 한편, 베를린 공습과정에서 폭격을 맞아 사망한 악질 판사 [[롤란트 프라이슬러]]의 재판 동영상을 검사 측에서 틀었는데, 괴링이 홀로코스트 영상보다 더 불쾌하다고 깠다. 그러나 그의 동생 [[알베르트 괴링]](1895-1966)이 몰래 유태인과 소련군 포로들을 석방한 사실을 알게 되자 "반역죄로 처형한다고? 당신 동생이나 간수하라"라고 비꼼을 당했다. 괴링의 동생 알베르트는 나치와는 전혀 무관했고, 형과는 달리 나치를 반대했으며, 아이러니하게 형의 배경을 이용하여 많은 유대인들을 구했다. '''[[못된 형과 착한 아우|한 가지 반전은 바로 괴링도 측근들을 통해서 이 사실을 어렴풋이 알았지만]] [[혈연|그냥 모른 척 넘어가주고 있었다는 점이다.]]''' 알베르트 괴링은 유대인 구원을 위해 자기의 사재를 털기도 했지만, 잘 되지 않을 때에는 형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했고, 실제로 도움을 얻어내기도 했다고 한다. 알베르트 괴링은 이걸 근거로 형을 구명하려 했지만, 워낙 죄가 커서 그걸 감안하고도 사형이 내려졌다. 그는 전후에 괴링의 동생으로서 서방 연합국과 체코에 의해 두 번이나 체포되지만 그가 구해주었던 사람들이 줄줄히 증언하여 두 번 다 무사히 풀려났다. 그리고 [[에르하르트 밀히]] 공군 원수가 [[유대인]] 이라고 의심 받아 강제 수용소로 갈 처지가 되자 괴링은 '''[[홀로코스트|누가 유대인인지는 내가 결정한다]]'''[* 이 말 자체는 괴링이 먼저가 아니라 오스트리아 빈의 시장이었던 정치인인 카를 루에거(Karl Lueger)가 먼저 한 말이었지만 루에거는 돈 있고 오스트리아 사회에 잘 적응한 사람은 보호받아야 할 좋은 사람이고 돈 없고 오스트리아에 적응 못 한 사람은 유대인이니까 꺼지라는 뜻으로 했던 말이다.]라고 말하며 밀히를 보호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나치의 고관중 넘버 원일 뿐만 아니라 공식적으로 히틀러의 후계자였고[* 나치당 시절부터 2인자였고 1939년 독일 국내 법령으로도 히틀러의 후계자로 선포되었다. 누구와 공식적으로 히틀러의 후계를 놓고 경쟁한 일도 없다.][* 힘러는 당내 기반이 전혀 없는 듣보잡에다가 괴벨스는 군내 기반이 전혀 없고 히틀러의 신임이 절대적인 인물이었을 뿐이다. 차라리 마르틴 보어만이라면 모를까… 하지만 보어만은 당시에 어딨는지 파악이 안됐고 훗날 1972년 베를린 재개발 중 포격으로 숨진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로 발견되었다. 1998년에 아들을 통해 받은 유전자 검사로 확정.] [[카를 되니츠]]는[* 되니츠 제독은 대통령 직책을 승계받아 거쳐간 자리로만 치면 전범들 중 최선임이었으나 연합국에서 인정을 안 해줬고, 전쟁 기간 중 범죄 행위가 가장 적고 인지도도 낮았던 해군 출신이었다.] 히틀러 대신 목매달 만한 사람은 아니였고, 또 누군가는 나치스가 대전 기간 내내 벌인 잔학행위 등을 대표해 책임을 져야 했기에 결국 '''[[사형]]''' 판결을 받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